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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속 한국사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의 깐부, 클레오파트라

by 낭만호랑이 2022.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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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유치원 동기일 수도 있었다. 서로 만나본적은 없지만, 두 사람 모두 기원전 69년에 태어나 한 세상을 평정했던 엄청 쎈 깐부다. 

 

박혁거세

출생 기원전 69년 3월 1일
즉위 기원전 57년 4월 28일
사망 4년 3월 (향년 72세 추정)

거서간 진한의 말로 왕, 혹은 귀인의 칭호라 한다. 삼국유사 의하면 백마가 낳은 알에서 혁거세 거사간이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경주시 선도산의 산신인 사소 부인이 혁거세 거서간을 낳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그의 출생을 포함한 모든 기록들은 오랜 신화로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설화에 따르면 기원전 69년, 사로국 6부 촌장들이 모여 나라의 기강을 잡고자 임금을 세우는 회의를 하던 중, 회의 장소인 알천 언덕에서 남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양산(楊山)이라는 산기슭에 번갯불 같은 이상한 기운이 보여 내려가 보니, 양산 기슭에 있는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곁에서 번갯불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하얀 말 한 마리가 절하는 것처럼 한참을 엎드려 있다가 하늘로 날아갔다. 촌장들이 달려가보니 자주색 알이 하나 있었는데, 이것이 곧 깨지고 그 안에서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촌장들은 이 광경에 놀랐지만 아이를 동천이라는 샘에 데리고 가서 몸을 씻겼다. 그러자 아이의 몸에서 광채가 나며, 짐승들이 모여들어 그 아이를 반기니, 하늘과 땅이 울렁이며 태양과 달이 더 밝게 빛났다. 촌장들은 아이가 나온 알이 박과 같이 크다하여 성을 박 씨로 짓고 이름을 혁거세라고 지었는데, 그가 바로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라고 전해진다. 

 

 

클레오파트라

출생 기원전 69년
즉위 기원전 51년
사망 기원전 30년 8월 12일 (향년 39세 추정)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흔들리는 정치적 위세에 휘둘려 로마 변두리 생활부터 여러 가지 경험을 하게 되는데,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 원로들의 도움으로 그의 왕권을 되찾게 된다. 기원전 52년 5월 31일,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왕권과 함께 로마 공화국에 1,750만 드라크마에 달하는 빚을 남겼다. 

 

기원전 51년 8월 29일부터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단독 군주로 등장하는데, 이는 오빠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밀려 공동 통치자가 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50년 가을이 되자 클레오파트라의 이름 앞에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먼저 서명하는 등 클레오파트라를 밀어내는 데 성공하고, 기원전 49년부터 비로소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기준으로 한 기년법이 부여된다.

 

오랜 오빠와의 내전에서 진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도망쳐 테베 지역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이집트에 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던 로마의 카이사르를 설득하고자, 그와의 비밀스러운 만남을 추진하기 위해 매력적인 모습으로 카펫으로 자신의 몸을 둘둘 말아 카이사르의 숙소로 잠입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를 눈치챈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클레오파트라를 몰아내고 이집트를 단독 통치하려 김 싸움을 했으나 결국 카이사르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이후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이집트를 공동통치하였다. 

 

로마에 있는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없던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아이에 대해 발언하기를 꺼려했으나, 아들의 이름을 '카이사리온'이라고 지은 클레오파트라는 그 아이가 카이사르의 아이라고 여러 번 공식적으로 밝혔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로마 내에서의 세력 다툼으로 3월 15일에 암살되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헛된 희망으로 4월 중순까지 로마에 머물렀다. 이집트로 돌아온 지 몇 달 후,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독살함으로써 그녀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그녀의 공동 통치자로 격상시켰다.

 

카이사르의 암살이후 로마에는 카이사르 편에 선 안토니우스와 암살자 편이었던 카시우스로 나뉘어 내전이 일어나는데, 안토니우스의 승리로 내전은 끝난다.  클레오파트라는 내전 동안 카시우스를 지원했다는 오해를 풀고 레반트의 영토 교환을 목적으로 회담에 참석하지만, 안토니우스는 사랑에 빠져 개인적인 교제를 목적으로 클레오파트라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카이사르의 사후 가장 강력한 인물이라고 생각한 까닭에, 후계자를 낳을 자신의 남편감으로 선택했다.

 

안토니우스는 현재 로마의 손에 있는, 과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토를 클레오파트라에게 다시 돌려줄 수 있는 권한 역시 가지고 있었는데, 기원전 38년 11월 19일에 이 영토들이 클레오파트라의 영토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와 함께 지내던 기원전 41-40년 겨울에 양도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부인에게서 두 딸을 낳은데 이어 사령부를 아테네로 옮기면서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가 틀어지게 된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두 아들을 낳는동안 예전 이집트이 많은 영토들을 복원하게 되는데, 로마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노예로서 로마의 자유와 영토 보전을 전복하려 한다고 비난한다. 안토니우스와 계속 갈등을 격던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0년 봄, 이집트를 침공하는데, 긴 전쟁 끝에 안토니우스의 해군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고 기병대가 그 뒤를 따른다.클레오파트라는 측근들과 함께 무덤에 숨는데 이때 안토니우스에게 목숨을 끊었다는 전서를 보낸다. 이에 절망한 안토니우스는 배를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어 53세의 생애를 마친다.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전쟁 전리품으로 전락할 것을 눈치챈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0년 8월 10일 39세의 나이로 자신의 무덤에서 목숨을 끊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사실에 분개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 옆에 왕의 위엄을 갖춘 채로 매장했다고 한다.

 

한때 성적인 관심거리로만 평가되던 클레오파트라는, 이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과는 다르게 강대국 로마 제국을 이용하여 이집트의 황금기를 다시 한번 열고자 했으며, 고대 이집트 어를 사용하는 등, 이집트의 부활을 위해 누구보다 노력했던 진정한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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